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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코리아

이승만 대통령은 왜 작전지휘권을 이양했을까?

국가 이익과 민족 생존권 확보를 위한 결단
대미협상의 지렛대... 한미동맹의 기반으로 활용

남  정  옥    군사연구가/역사학 박사

 

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은 1950714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전격 이양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 당시 작전지휘권(엄격한 의미에서 작전통제권) 이양은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을 포함하여 군 수뇌부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해 국내 학계는 전쟁수행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점을 들어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작전지휘권 이양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한미동맹의 근간을 이루며 대북 억지전략으로 크게 작용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해서는 주권의 포기라는 일부의 비판이 여전히 남아 있다. 당연히 이승만의 평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왜 작전지휘권 이양이라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리고 이승만은 무엇을 얻으려고 했던가?


1950714일 작전지휘권 이양 시기는 적절했는가?

 

유엔안보리가 195077일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의하고, 그 권한을 미국에게 위임한 후 이와 관련된 조치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잘 짜여 진 시간표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유엔안보리로부터 유엔군사령부에 관련하여 권한을 위임받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78일 미 합동참모본부(이하 합참)가 단일후보로 추천한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元帥)를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 합참은 710일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임명됐음을 통보했다. 유엔군사령관에 맥아더가 임명된 데에는 미 국무부 고문이었던 덜레스(John F. Dulles)한국에서의 전쟁이 세계전쟁으로 발전되는 것을 막아야 된다는 점을 고려 할 때 맥아더가 적임자라고 추천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유엔안보리에서는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의할 때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유엔회원국은 자국의 국기와 함께 유엔기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유엔사무총장 리(Trygve Lie)는 상징적으로 유엔군사령부에 게양될 유엔기를 유엔주재 미국대표를 통해 미국 정부에 전달했고, 미국 정부는 육군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 대장으로 하여금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유엔기를 전달하도록 했다. 이에 콜린스 육군총장이 유엔기를 전달하러 714일에 일본 도쿄로 가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직접 전달했다.


이승만은 이런 타이밍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유엔기가 유엔군사령관에게 전달된 714, 바로 그날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미국대사 무초(John J. Muccio)를 통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이양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유엔회원국이 아닌 대한민국이 유엔회원국의 자격을 얻게 됐고, 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당당히 싸울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유엔안보리가 규정한 북한의 국제평화 파괴 및 침략행위에 유엔군과 공동으로 대처하게 됐다. 이는 유엔의 전쟁에 대한민국은 전쟁의 직접 당사국이면서 유엔회원국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작전지휘권을 이양한 날인 714일은 정치 및 군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이 날은 육해공군총사령부 겸 육군본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했고, 그 전날 유엔군지상군사령부 겸 미 제8군사령부도 대구에 설치됐다. 그런 의미에서 714일은 유엔군작전이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되는 상징적인 날이었다. 유엔사무총장은 유엔을 대표한 카친(Alfred G. Katzin) 대령을 717일 대구로 보내 유엔군지상군사령관 겸 미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에게 유엔기를 전달하도록 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의 타이밍은 절묘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정치학자로서 그의 뛰어난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이승만이 아니면 감히 생각할 수도 또 그렇게 정확히 타이밍을 맞춰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직 이승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전시지도자로서 이승만의 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작전지휘권 이양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이승만은 작전지휘권을 넘겨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승만 대통령은 713일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정일권 총장에게 영문으로 된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내용을 보여주고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의견을 물었다. 이때의 상황이 정일권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먼저 신성모 장관에게 어떠한가? 라고 물었다. 신장관이 각하 잘하신 결정입니다라고 말하면서, “77일 유엔안보리 결정으로 유엔군이 창설됐습니다. 또 유엔군의 총지휘를 맥아더에게 맡게 된 만큼 우리 국군도 그 산하에서 함께 싸우는 뜻에서 필요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정일권 장군에게, “정장군도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정장군은 , 각하, 하오나몇 가지 문제되는 점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있겠지, 나도 그 점을 생각하고 있네.”라고 말하면서, “어떤 점이 걱정되는가?”라고 물었다정일권은 , 지휘권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우리 국군이 자체 편제라든지 인사문제는 절대로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통령은 옳은 말이오. 우리 국군은 어디까지나 우리 대한민국의 군대이니까.”라고 말했다.


정장군이 다시 우리 국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작전을 우리 뜻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불편한 점을 각오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그러한 때가 있겠지, 그러나 이 중대한 때에 우리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처지오. 그러니 그러한 불편을 겪더라도 그들의 작전을 원만히 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므로 이 결정을 내린 것이오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언제라도 작전지휘권을 되찾아 올 것입니다. 이 점을 유의해서 앞으로 미군과 잘 협조하여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정일권 총장이 우려했던 군 인사문제에 있어서도 미군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국방부 및 육군본부 대령급 국장을 비롯하여 대령급 사단장을 대부분 장군으로 진급시켰고, 정일권 육군총장을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미8군사령관과 같은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그것도 부족하여 나중에는 백선엽 총장을 미8군사령관보다 높은 대장으로 올렸다. 그래서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 후임으로 온 미8군사령관 테일러(Maxwell D. Taylor) 중장은 영접 나온 백선엽 대장의 계급장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이승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인사권 행사였다.


특히 국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작전에 대해서도 유엔군이나 미군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사했다. 이승만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사령부에서 38도선 돌파명령을 내리지 않자, 929일 육군본부가 있는 대구로 내려가 정일권 총장에게 내가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해서 101 38도선에 제일 먼저 도달한 국군 제3사단이 38도선을 돌파하게 됐다. 이승만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01일을 국군의 날로 정했다.


또한 이승만은 전시에는 유엔군부사령관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여기에 국군 장성을 앉히려고 했다. 명분은 유엔군 작전을 협조하며 돕기 위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다운 발상이었다. 군의 편제상 사령관이 있으면 반드시 부사령관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유엔군사령부에는 부사령관이 없었다. 이승만은 이것을 노렸다. 하지만 미국의 반대로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승만은 작전지휘권 이양을 계기로 국가와 군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은 거리낌 없이 수행해 나간 역량 있는 국가지도자였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작전지휘권 이양을 중요한 협상 카드로 활용했다. 특히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휴전정책을 추진해 휴전이 성사단계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은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시켜 단독 북진을 하겠다며 미국에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이에 워싱턴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우방국의 맹주임을 자처하는 미국이 도움을 주고 있는 대한민국 군대가 유엔군에서 철수하여 미국과 유엔이 추진하고 있는 휴전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올 경우, 미국의 국제사회에서 초강대국으로서의 지도력에 상처를 입는 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거기에다 공산국가는 이를 기회로 도와주고 있는 한국도 통제하지 못한다며 미국을 비아냥거리며 조롱거리로 삼을 것이 뻔했다. 실제로 반공포로석방 후 공산군 측은 미국에게 한국정부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런 미국을 어떻게 믿고 휴전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느냐며 비난했다.


그렇게 될 경우 미국의 국제적 위신과 초강대국으로서의 지도력은 추락되기에 충분했다. 이승만은 이 점을 노렸다. 그는 전쟁초기 유엔회원국이 아닌 대한민국 군대를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우게 했던 작전지휘권 이양을 미국과의 협상에서 대한민국 국익을 위해 비장하면서도 유리한 카드로 활용했다. 이승만은 우리가 필요로 해서 준 전쟁초기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해 준 작전지휘권 이양이라는 카드를 미국과의 어려운 협상 때마다 매우 요긴하게 써 먹었다. 이른바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국군의 유엔군 철수라는 카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데도 크게 한몫했다.


오죽했으면 이승만을 통제하기 위해 미국은 한미상호방조약을 위한 세부사항을 합의한 19541117한미합의의사록,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 방위를 책임지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통제권 하에 둔다고 못을 박았을까.


이처럼 이승만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대한민국이 하찮은 존재가 아닌 대등한 존재로서 임했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아주 당당하게 얻어냈다. 이승만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기준은 국가이익과 민족의 생존권이었다. 작전지휘권 이양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게 볼 때 사회일각의 작전지휘권 이양이 주권포기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작전지휘권 이양을 국익을 위해 활용한 이승만의 위대함이 돋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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