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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코리아

군인 박정희를 살린 건 6·25전쟁이었다?

남로당 가입 혐의로 1949년 군복을 벗었지만...
대한민국 최대 위기에서 능력 발휘, 군 요직 두루 거쳐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은 대한민국 중흥을 이루게 한 군인 출신 국가원수이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을 통해 다져 놓은 터전위에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을 창조해 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국가지도자로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군 조직에서 수 십 년간 다져온 추진력 있는 리더십으로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구호아래 ‘5천년 묵은 가난의 때를 씻게 한 새마을 운동을 전개해 국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고,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놀라운 경제발전을 달성했으며, 자신만 빼고 모두가 반대하는 중화학공업건설과 경부고속도로를 뚝심으로 건설했는가하면, 북한군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튼튼한 자주국방을 확립함으로써 일류국가로 성장할 발판을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창업을 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수성(守成)에 머물지 않고, 대한민국을 가일층 발전시켜 세계 각국이 부러워할 선진강국의 토대를 마련한 역량 있는 국가지도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그런 이면에는 군인기질이 숨겨있었다. 그의 62년 일생 중에서 군인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군인으로 지낸 세월과 그 속에서 다져진 국가지도자로서 역량이 군인시절에 배양됐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군인시절은 특별하다. 박정희의 삶의 여정은 군인을 포함해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보통학교 교사생활과 군인시절 그리고 대통령재직기간이다. 그 중에서도 23(19401963)간은 군인의 길을 걸었다. 유년기와 짧았던 교사시절(3)을 제외하면 인생 전반부의 거의 대부분을 군인으로 보냈고, 인생 후반부는 대통령(19631979, 59)으로 지냈다. 또 대한민국 헌법에 대통령 직이 국군을 통괄하는 국군통수권자라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일생은 곧 군인의 삶이었다. 그만큼 박정희 대통령이 걸어온 군인의 길은 그의 인생관·사생관·국가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군인으로서 박정희의 일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박정희는 매번 늦은 나이에 어렵게 군문에 들어갔다. 그것도 최초에는 나라 없는 식민지 백성의 몸으로, 오로지 어릴 때 꿈꾸며 흠모했던 나폴레옹과 이순신 장군과 같은 위대한 군인이 되고자 군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이 소위로 임관할 나이인 23(1940)에 만주신경군관학교에 들어갔고, 또 다른 사람이 대위 계급장을 달고 중대장을 할 나이인 27세에 그는 비로소 소위로 임관했다. 그럼에도 군에서 그의 진출을 빠른 편이었다. 거기에는 수석을 할 정도의 뛰어난 교육성적과 장교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인 리더십과 군사적 지식 및 식견이 늘 범인(凡人)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8·15해방이 되어 19469월에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뒤늦게 입교할 때도, 29(1946)이었던 박정희의 나이는 같은 동기생에 비해 78살이나 많았다. 중대장을 하고도 남을 나이에 그는 또 다시 사관학교에 들어가 소위로 임관했다. 비록 많은 나이에 임관했지만 박정희는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육사 제2기를 3등으로 졸업할 정도의 우수한 성적과 뛰어난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소위에서 중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대위로 진급했고, 얼마 안 돼 또 다시 소령으로 진급했다(1948).


평범하지 않은 리더십과 군사적 식견이 그를 빠른 진급으로 연결시켰다. 이는 주머니 속을 뚫고 나올 정도로 출중한 인물을 의미하는 낭중지추(囊中之錐)에 해당했고, 많은 닭 무리 속의 한 마리 고고한 학을 뜻하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의 면모를 박정희는 보여줬다. 그를 바라보는 상급자의 눈은 모두 한결 같았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이로부터 얼마 안 돼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에 가입한 혐의로 1949년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이 됐다. 군인을 천직으로 여겼던 박정희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커다란 시련이었다. 박정희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때마침 박정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이 정보국 귀퉁이에 자리를 마련해 줬다. 비록 문관신분이었으나 박정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묵묵히 일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자기와의 고독한 극기싸움이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그때 뜻하지 않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기습남침이었다. 6·25전쟁이 터진 것이다전쟁이 일어나자 정보국에는 일손이 부족했다. 그것도 정보를 종합하고 분석하여 판단할 능력을 갖춘 장교가 필요했다. 여기에 적격자가 박정희이었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일권 육군총장에게 건의했다. 박정희를 현역으로 복귀시키자는 것이었다. 군인으로서 박정희의 출중한 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정일권 총장도 대찬성이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이승만 대통령에게 박정희의 복직을 상신해 재가를 얻어냈다. 이로써 박정희는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방어선이 무너지고 국군이 후퇴하던 19507월 초순에 그동안 그에게 올가미처럼 씌워졌던 좌익혐의를 모두 벗고, 육군소령으로 복직되어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당당히 근무하게 됐다.

 

박정희 소령이 복직될 당시 전황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최대의 위기였다


미 지상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낙동강 쪽으로 계속 밀려났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험했다. 국가적 위기였다. 이때 박정희 소령은 전투정보과장으로서 적정을 종합하고, 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국군 및 유엔군 지상 작전에 기여했다그런 공적을 인정받아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그날인 1950915일 박정희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했다. 얼마 후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도 장군 진급과 동시에 새로 창설되는 제9사단장에 보직됐다. 이때 박정희 중령의 업무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의지했던 장도영 사단장이 그를 사단참모장에 임명했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통상 연대장을 마친 대령급 장교가 참모장을 하던 때에 신참 중령이 참모장을 맡았으니, 사단장의 신임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가 195010월 상황이다.

 

9사단에서 박정희 중령은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 상황이 어렵게 되자 참모장뿐만 아니라 작전참모도 겸했다. 두 몫을 할 만큼 그의 능력은 출중했다. 박정희 중령은 1951년 중공군 5월 공세 직전까지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있으면서 육영수(陸英修) 여사와 결혼도 하고 대령으로 진급까지 했다. 휴전 때까지 그는 육군정보학교장, 육군본부 작전국차장(작전국장 이용문 준장),포병 전과(轉科) 교육(2) 등을 거치며 군인으로서 능력을 마음껏 펼쳤다. 그의 포병전과에는 육군포병감 신응균 장군의 도움이 컸다. 보병 대령이었던 박정희는 이때 포병으로 전과하면서 장군 진급이 빨랐다. 그 당시 육군은 포병을 확장하던 시기였다.

 

휴전된 지 얼마 안 된 19531125일 박정희 대령은 드디어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장군이 됐다. 임관한 지 7년만의 일이었다. 이때 육군참모총장은 숙군(肅軍) 때 구명(求命)해 주고 정보국에 자리를 마련해 줬던 백선엽 대장이었다. 그 후 육군포병학교장, 5사단장, 6군단 부군단장(군단장 백인엽 중장), 7사단장을 거쳐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소장 진급 후 그는 송요찬 제1군사령관의 특별요청으로 군사령부 참모장을 맡았. 이때 군사령부 작전참모가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준장이다. 채명신과 박정희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채명신이 육사생도시절 박정희는 육사중대장 겸 교관으로 그를 가르쳤기 때문에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 또 두 사람은 평양사범학교(채명신)와 대구사범학교(박정희)를 나온 공통점도 있다. 그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군의 고질병이었던 후생사업을 없앴는데 기여했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군에서 청렴과 개혁의 상징으로 뭇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박정희 소장은 제1군사령부 참모장을 마친 후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육본작전참모부장, 6관구사령관, 군수기지사령관, 2군부사령관(군사령관 최경록 중장)을 역임했다. 참모총장만 빼고 군의 요직은 모두 거친 셈이다. 박정희의 그런 역량과 능력을 따르며 존경하던 중견장교들은 그를 참신한 군부지도자로 떠받들었다


때맞춰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뜻있는 군인들이 분연(奮然)히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5·16혁명이다. 이때 박정희 장군이 국가지도자로 선택된 것은 숙명이자 운명이었다. 그로부터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하에 창조적 국가개혁을 통해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군인 박정희의 그동안 갈고 닦은 모든 능력이 마치 용암처럼 분출되며 빚어낸 결과였다. 박정희를 군인과 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박정희는 바로 군인이었고, 대통령의 리더십은 군인 박정희에게서 나왔다. 그런 군인 박정희를 살린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6·25전쟁이었다

                                               남정옥 <군사연구가/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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