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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코리아

6.25전쟁과 대통령 이승만

유비무환의 사고를 가진 대통령 이승만,
북한의 남침을 이미 예견하였고, 미국과 등등한 위치에서 전쟁을 이끌어...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과 수준은 현대전을 지도하고 수행할 수 있는 전쟁관리나 위기관리능력이 축적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그런 상황에서 북한으로부터 남침을 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열악한 안보상황에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고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고, 국군을 70만 대군으로 성장케 한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의 전쟁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승만은 6·25전쟁 이전 전쟁대비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 이전 한반도에서 전쟁 억지력을 갖추고자 구상했던 이승만의 한반도 방위전략구상은 일반 범인(凡人)의 능력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미국 명문대학을 나온 이승만의 풍부한 학식과 경험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전략적 혜안(慧眼)은 매우 뛰어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의 전쟁 리더십은 다른 어느 나라의 국가지도자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하겠다.

 

전쟁이전 이승만의 방위전략 구상

 

이승만은 전쟁이전 북한의 전력증강에 즈음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이른바 한반도 방위전략구상으로, 여기에는 한미동맹결성,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 선언, 태평양동맹 결성, 국군전력증강, 해군기지제공 등이 들어있다. 이를 위해 그는 대통령특사 파견과 주미대사를 통해 미국의 군원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 일들은 이승만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승만이 주장한 주한미군 철수반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를 대체할 나토(NATO)와 같은 태평양동맹이나 한미동맹 결성도 시기상조 또는 미국의 전략에 부합되지 않다며 거부됐다. 또한 진해군항을 미국의 해군기지로 제공하겠다는 이승만의 제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은 우리나라는 우리가 지키겠으니, 전차와 전투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들 무기는 공격용 무기일 뿐만 아니라 한국지형에 맞지 않다며 거절했다.


대신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한국을 미국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국무장관의 연설이었다. 6·25전쟁은 그로부터 정확히 5개월 뒤에 터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의 그동안 처사에 그 누구보다도 억울한 입장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힘없는 국가의 지도자로서 엄청난 비애를 맛보지 않으면 안 됐다. 하지만 이승만의 이러한 구상은 전쟁억지차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남침당시 남북한의 군사력과 이승만의 인식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일 뿐만 아니라 북한의 공신침략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지켜 낸 국권수호의 대통령이었다. 이승만은 광복이후,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어렵게 이룩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2년도 안 돼,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은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른바 6·25전쟁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방어형 군대로 무기와 장비가 열악했다. 이는 국군을 창설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38도선에서 국경충돌을 방지하고, 국내소요사태를 진압할 수 있는 치안유지에 적합한 경비대 수준의 군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현대전 수행에 적합한 전차와 전투기는 제공되지 않았다.


이와 달리, 북한군은 소련으로부터 T-34전차와 야크 전투기 등 현대전에 적합한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채, 독일과의 전쟁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수립해 준 남침공격계획과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도하에 사단단위 기동훈련까지 모두 마쳤다.


그러한 점을 고려할 때, 남침 당시 비록 국군이 반공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됐다고는 하나, 북한과의 전력 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다시 말해 남북한의 병력은 2:1로 열세했고, 전투력을 가늠하는 무기지수에서도 8:1로 국군이 열세했다. 여기에 북한군은 중공군 내 한인병사 약 6만 명을 편입했다. 이러한 남북한의 전력차이를 고려하면 북한의 승리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상황 당시를 평가하기를, “제갈량(諸葛亮)이가 국무총리였어도, 공산군의 장총대포(長銃大砲)와 전차를 막을 수 없었다. 또 정부가 이에 대한 대책을 미리 세우지 못한 것은 미국의 군사물자가 오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다라며 미국의 소극적 대한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장군은, “국군의 전력이 북한군의 절반 수준도 안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기습으로 허망하게 당했다고 회고했다.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 리더십의 특징

 

이승만은 전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킨 북한과 이를 지원하는 소련 및 중국과 전쟁을 치렀고, 북진통일을 미루며 휴전정책을 추구하는 미국과 민족의 생존권을 놓고 투쟁했다. 이승만의 그런 리더십의 기저에는 애국심과 국가이익이 가슴깊이 깔려 있었다. 이승만은 여기에 바탕을 두고 국무(國務)를 처리했고, 전시내각(戰時內閣)을 이끌며 전쟁을 지도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전쟁지도자로서 보여줬던 전시 리더십 특징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이승만은 국가원수 및 전쟁지도자로서 탁월한 전략적 선택을 했고, 이것은 올바른 결정이었음이 입증됐다. 전쟁 초기 전황조차 제대로 보고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승만은 통수권적 차원에서 역할분담을 실시했다. 이승만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최우선을 두고 행동했다. 그는 무초 미국대사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는 가운데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에게 미국의 지원을 위해 간단없는 지시를 했고, 미 극동군사령관과 주한미국대사에게는 국군에게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끈질기게 요청해 이들 무기를 적시에 지원받았다.


이처럼 이승만은 미군 참전 이전 전쟁지도자로서 평정을 잃지 않는 가운데 전시외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유엔안보리는 신속히 한국지원을 결의했고, 미국도 역사상 가장 빨리 참전하게 됐다. 이에 북한은 전쟁모의 과정에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미국이라는 강적을 맞아 새로운 전쟁을 치르게 됐다반면, 이승만은 작전분야에 해당하는 부대이동이나 병력배치 등의 순수한 군사작전에 대해서는 군 수뇌부에 일괄 일임했다. 이른바 역할분담이었다.


둘째, 전쟁수행과정에서 이승만은 한반도 통일과 북진통일이라는 전쟁목표를 전쟁 발발 첫날에 결정하고, 전쟁기간 내내 이를 일관되게 추진해 나갔다. 이는 대한민국의 국권을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미국으로부터 한미동맹과 국군의 전력증강이라는 성과를 얻어내게 했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입장임에도, 북진통일이라는 확고한 전쟁목표 아래 국군 통수권자로서 의연하게 행동했고, 도움을 주고 있는 미국에게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필요한 것을 얻어냈다. 이승만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이승만의 애국심, 카리스마적인 지도력, 미국 최고 명문대학을 졸업한 학문적 배경, 그리고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고 판단할 줄 아는 통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승만에게 그러한 뚜렷한 국가적 목표가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베트남전쟁에서 자유월남처럼 일찌감치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셋째, 이승만은 전쟁기간 국가이익에 바탕을 둔 실리적 전쟁지도방식을 택했다. 그는 전쟁수행 중, 유엔군의 원활한 지휘를 위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했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이 유엔회원국이 아닌 점을 간파한 이승만이 국군을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우도록 하기 위한 현명한 조치였다. 또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도 미국으로부터 전후 대한민국의 안전과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전쟁기간 내내 일관된 전쟁지도방식을 취했다. 다만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르게 보였을 뿐이다. 그는 돈키호테식의 전쟁지도를 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국가이익에 바탕을 둔 전쟁지도방식을 선호했다. 그러다보니 미국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까지 수립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이승만을 대신할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반공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넷째, 이승만은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전쟁을 지도했다. 이승만은 미국을 상대할 때, 항상 자신감을 갖고 행동했다. 미국과의 대한정책을 놓고 협의할 때도 먼저 원칙론을 내세워 강력한 주장을 폈다. 이는 미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실리를 얻어내려는 이승만식의 협상전략이었다. 휴전협상 막바지에 그가 강력히 주장했던 국군 단독의 북진통일이나 정전협정체결 반대도 모두 국가미래를 위한 전략이었다. 그 당시 유엔군사령관이던 클라크 장군은 이러한 이승만을 보고, “미국과의 협상에서 명분을 적절히 구사해 실리를 얻어내는 외교적 수완을 도대체 어디에서 터득했는지 알 수 없다며 탄복을 금치 못했다.


다섯째, 이승만은 전쟁기간 내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해외 망명정부 수립과 일본군의 한국전 참전을 결사반대했다. 지연작전 때, 무초 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망명정부 얘기를 꺼냈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고, 낙동강 전선에서 전황이 어려울 때, 워커 장군이 정일권 장군을 통해 망명정부 운운했다가 강한 불신을 받은 적이 있다. 또 중공군 개입으로 야기된 19511·4후퇴 이후 미군에서 일본군 참전을 언급했다가 이를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이 대노했던 적이 있다. 이승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해외망명정부 수립과 일본군의 참전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이승만의 전시 리더십에 대한 평가와 의의

 

이승만의 전쟁지도자로서 리더십은 전쟁 초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미군의 신속한 개입을 재촉하기 위해 노력했고, 미군참전 이후에는 전시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하여 미국의 책임하에 전쟁이 수행되도록 조치했다. 또한 이승만은 자신의 평생숙원이자 민족최대 과업(課業)인 북진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휴전 후 26·25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국군 전력증강 등 전쟁억지력 확보를 위해 벼랑 끝 전술로 맞서며, 미국으로부터 이를 온전히 쟁취해 냈다.


전쟁기간 이승만은 오로지 대한민국의 장래 운명과 국민의 생존권을 위해 위국헌신(爲國獻身)했던 국가지도자였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로서, 국가원수로서, 전쟁지도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국가과업을 훌륭히 완수했다. 그런 점에서 전쟁기간 이승만과 함께 싸웠던 대한민국 국군과 국민들의 입장에서, 이승만의 존재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존재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6·25전쟁 기간 이승만의 공로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남 정 옥  군사연구가/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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