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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코리아

지도자·군·국민의 단결 VS 4분 5열과 부패·무능

+ 6·25전쟁과 월남전... 월남의 패망은 필연이었다 +

 

남 정 옥   군사연구가 문학박사

 

6·25전쟁과 월남전(베트남전쟁)은 전쟁사측면에서 여러 가지 공통점과 상이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두 전쟁은 시기적으로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끝내고 난 1945년 이후 일어난 전쟁이었고, 전쟁의 성격도 미국 등 서방국가의 지원을 받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과 월남(남베트남)이 소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체제의 북한과 월맹(북베트남)이 자국의 영토에서 싸운 이념 및 제한전쟁이었으며, 1·2차 세계대전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승리한 미국과 소련이 각각 이념과 체제를 달리해 자신의 후원국을 지원한 전쟁이었다.



                                                          (6.25전쟁)


(월남전)                                                       


 또한 이 두 전쟁은 전쟁에서 전시 국가지도자의 역할을 비롯하여 정부의 전쟁수행목표와 능력, 전쟁의 주역인 지휘관들의 역할과 군인들의 전투의지, 그리고 국민들의 전쟁참여도 및 호응이 얼마나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미치는지를 교훈으로 보여줬다. 북한의 남침을 받고 전쟁초기 열악한 무기와 장비 속에서 불리한 전쟁을 수행했던 대한민국은 미국과 유엔의 지원을 받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며 현재 세계 10위권에 들어가는 무역대국으로 성장했으나, 월남은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똑같이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수행했던 대한민국과 월남이 어떻게 이러한 극단적인 결과를 나타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했다.

 


 월남에는 뛰어난 국가지도자, 군사전략, 전투의지가 없거나 약했다

6·25전쟁시 미 제8군사령관을 역임하고, 월남전 때는 주월(駐越) 미국대사를 지냈던 테일러(Maxwell D. Taylor) 대장은 월남이 패망한 후 매우 교훈적인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한 적이 있다. 테일러 장군은 월남전 패망을 회고하는 자리에서,월남에 한국의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가 있었더라면, 월남은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테일러 장군은 미국의 월남전 개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월남전에 관한 한 테일러 장군의 발언은 자연히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테일러 장군은 미 제8군사령관을 거쳐 미 극동군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차례로 역임하고 퇴역했다. 그런데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 시절 그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합동참모의장을 맡았다. 미군에서 전시가 아닌 평시에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케네디 대통령이 그를 합참의장으로 발탁한 것은 순전히 월남전 때문이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월남전에 개입할 밑그림을 그린 사람이 바로 테일러 장군이었다. 케네디가 테일러를 발탁한 배경이다. 이후 테일러는 월남주재 미국대사와 존슨 대통령의 안보자문위원으로서 월남전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런 월남전이 결국은 월남의 패전으로 끝났으니 군인인 그로서는 회한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답이 바로 전시 국가지도자의 역할이었다. 6·25전쟁에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월남전에서 지엠(Ngo Dinh Diem) 및 티에우(Nguyen Van Thieu) 대통령을 비교해 봤을 때, 왜 월남이 패망했는지에 대한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시 국가지도자로서 어떻게 했는가? 북한의 남침을 받고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제 38도선은 없어졌다며 북진통일을 외쳤다. 국제사회에서 보기에 전쟁에서 밀리는 상황에서 그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핀잔을 줄 때였다. 이승만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오히려 이승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 기회에 통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는 영원히 사라진다며 미국과 유엔을 압박했다. 한국청년 100만을 무장시킬 무기도 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국가지도자부터 우리나라는 우리가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국민들도 여기에 동참했다. 학생들, 어린 소년소녀들, 여성들, 장년의 남자들, 청년들이 너도나도 전선으로 달려갔다. 군과 경찰만 싸운 것이 아니었다. 온 국민이 동참했다. 그 중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전쟁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민족이 하나로 되는 북진통일이었다.


 북진통일은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 그리고 국군의 전쟁목표이자 군사목표가 됐다. 국회도 국민들도 여기에 이의가 없었다. 정쟁(政爭)으로 싸우더라도 국가안위가 달리는 문제가 불거지면 한 목소리를 냈다. 바로 북진통일이었다. 나아가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미국의 휴전정책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은 죽기 살기로 휴전을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졌다. 여기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상이군인도, 남편과 자식을 잃은 부모와 미망인도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국군장병들도 국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받들었다.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시켜 북진통일을 완수하겠다며 호기까지 부렸다. 그렇지 않고는 미국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판이었다. 이른바 이승만식 벼랑끝전술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이 몸을 사리며 주저주저했던 한미상호방위조약도 밀어부처 타결시켰다.

그런데 월남의 국가지도자들은 전쟁에 대한 목표도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국가적 비전(vision)도 제시하지 못했다. 전쟁은 그들이 수행해 될 절대적 명제임에도 마치 남의 일처럼 뒷짐을 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전쟁은 미군과 한국군 등 우방국 군대가 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국민들은 전시임에도 평시처럼 철없이 행동했다. 행동은 그렇더라도 생각까지 그렇게 된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더욱이 월남정부의 관료와 군은 무능했고 부패하기까지 했다. 월남 지도자들의 족벌 독재체제와 군부의 무능이 그 중심축에 놓여 있었다.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에 대한 국가전략도 군사적 고민도 없었다. 어제도 괜찮았으니 오늘도 내일도 괜찮을 것이라는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했다. 국가의 장래는 뒷전이고 내 가족 챙기는 것이 더 먼저였다. 월남의 지휘관 및 장교들이 전투할 때 차량에 전투장비를 적재하지 않고, 전투차량으로 먼저 그들 가족부터 피난시켰다. 그런 군대가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이처럼 월남에는 특출한 국가지도자도, 전쟁에 이길 전쟁목표나 국가전략도, 백선엽이나 채명신 같은 뛰어난 지휘관도 없었다.

 


전쟁환경과 전쟁수행방식에서의 차이

군사적 차원에서 6·25전쟁과 월남전에서의 커다란 차이는 전쟁환경과 전쟁수행방식에서의 차이다. 계절적으로 한반도는 4계가 뚜렷한 반면 주로 전쟁의 주무였던 월남의 기후는 열대몬순기후에 속해 고온다습했고 정글지역이 많았다. 따라서 기동력과 화력이 뛰어난 미군의 전술과 교리에서는 전쟁수행에 적합한 환경조건은 아니었다. 정글지역에서 전투는 미군에게 새로 적응해야 될 새로운 전쟁이었다.

특히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의식하여 남북베트남의 국경선인 17도선 이남의 월남지역에서 활동하는 공산세력과 지역 무장세력인 베트콩 그리고 이 지역으로 넘어온 월맹군(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 이는 마치 6·25전쟁 시 국군과 미군이 남한의 공산세력인 남로당세력과 빨치산 그리고 38도선 이남으로 넘어온 북한군만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38도선 이북의 북한군과는 전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으로도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경우였다. 그런데 월남에서 미군과 월남군이 실제로 상대해야 될 적은 월남지역의 공산세력이나 베트콩이 아니라 월맹군(북베트남군)이었다. 전장지역도 17선 이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북지역에 대한 지상작전도 포함되어야 했다.

이는 미군과 월남군이 최초부터 전쟁지역과 전쟁 상대를 잘못 골라 전쟁을 하게 된 것부터가 문제였다. 17도선 이북지역의 적을 타격하지 못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미군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전쟁의 주도권을 갖지 못한 채 소모적인 전쟁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6·25전쟁 때 중공군의 힘의 근원인 중국본토 및 만주지역을 공격하지 않고, 그곳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성역화(聖域化) 함으로써 미군과 유엔군의 수족을 묶어두는 것과 유사한 경우에 해당됐다. 맥아더 원수가 중국본토를 공격하지 않은 워싱턴의 전쟁정책에 강력히 반발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오죽했으면 맥아더 장군이 승리에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워싱턴에 볼멘소리를 했을까!


 그렇다고 그런 부당한 전쟁수행에 월남의 대통령이나 군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워싱턴과 하노이가 주도한 휴전협상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평화협정을 위한 회담에 6·25전쟁 때 남로당에 해당하는 민족해방전선과 함께 참여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럼에도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전후 보장 없는 휴전에 반대하며 반공포로석방과 유엔군에서 한국군 철수라는 강경입장을 써가며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국군의 전력증강 등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월남은 국가생존전략은 아예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다보니 평화협정을 맺은 지 불과 2년도 채 못돼, 월남은 월맹군(북베트남군)의 무력공격을 받고 항복을 하게 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미국과 한국의 지원을 받았던 월남(남베트남)은 이제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됐다.

 

6·25전쟁과 월남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각오

6·25전쟁은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국가의 운명과 국민들의 생명이 달린 총력전이다. 그래서 온 국민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국가가 가장 어려운 시기인 낙동강전선으로 뛰어나갔다. 미국과 유엔의 도움도 중요했지만 대한민국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군인들은 적 전차에 맞서 수류탄과 박격포탄을 묶은 다발을 들고 적 전차 밑으로 들어가 장렬히 산화했고, 낙동강전선에서는 몰려오는 적을 향해 쉼 없이 던지는 수류탄에 팔이 퉁퉁 붓을 정도로 싸웠고, 그래도 몰려오는 적을 막기 위해 아군과 적군의 시체를 가리지 않고 방벽을 쌓고 싸우고 또 싸웠다. 그렇게 해서 밀고 올라간 것이 압록강까지였다. 신발의 밑창이 다 닳아 맨발로 걸으면서도 통일을 꿈꾸며 북진을 외치며 달려갔다.


 그런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군사적 승리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염려한 워싱턴이 휴전을 고려했을 때 한국 국민과 이승만 대통령은 절규했다. 3년간의 전쟁으로 입은 막대한 피해를 신생 대한민국의 국력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전후 미국의 보장이 없는 대한민국이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제식민지로부터 어떻게 독립한 나라인데, 또 다시 공산주의의 압제 속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바칠 수는 없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경향 각지에서는 휴전반대운동이 벌어졌다. 오죽했으면 미국에서는 그런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고까지 했을까! 그러나 단념했던 것은 이승만을 대체할 국가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구해낸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월남은 어떠했는가? 월남은 국가지도자가 부패했고, 정부는 무능했으며 군부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자국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데도 영국국민들이 1차 대전 이전 그들의 식민지전쟁을 멀리서 들리는 소음으로 느꼈던 것처럼, 월남국민들도 전쟁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전쟁에 무감각해 있었다. 그런 월남이 미국이나 한국의 군사적 지원 없이 오래 버틴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파리 평화협정으로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게 되자, 100만 대군을 자랑하던 월남군은 월맹군의 공격을 받자 제대로 저항한번 못하고 그대로 붕괴했다. 커다란 홍수에 강가의 초가삼간(草家三間) 떠내려가듯 무너졌다.

 

가안보에는 만일이란 것도, 가정이란 것도 없다. 한 번 없어진 나라는 다시 세울 수 없다. 우리는 6·25전쟁과 월남전에서 정부와 군 그리고 국민의 자세가 어떠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았다.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교훈을 주고 있다. 전쟁은 무기만 갖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수반된다는 것을 6·25전쟁 때 충분히 경험했다. 월남전에서도 전쟁은 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도 얻었다. 그런 점에서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격언(格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작금(昨今)의 군에서 들려오는 방산비리와 각종 군기사고가 빙산(氷山)의 일각이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6·25때 선배전우들의 호국정신과 군인정신을 되새기며 분골쇄신(粉骨碎身)의 각오로 일신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내 가족과 부모 그리고 영원히 물려줄 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안보적 차원의 막중한 의무이자 책무를 다하는 길이 될 것이다.






나도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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